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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했던 당대 최대의 절터 보령 성주사지

국보 제8호 낭혜화상탑비가 있는 보령 성주사지

2020.07.13(월) 10:15:10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 남쪽 기슭에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절이 있었던 넓은 공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주사지(聖住寺址), 보령시 홈페이지 관광명소에서 그 내력을 찾아 봅니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동3층석탑, 중앙3층석탑(보물 제20호), 서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보령시 홈페이지에서
 
2000여명의승려가수도했던당대최대의절터보령성주사지 1
 
애초 이곳을 방문할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충청남도 보령 성주산 화장골계곡 편백나무 숲에서 산림욕을 즐기려고 찾아가던 길이었지요.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길을 심연동계곡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우연히 들르게 되었습니다.

성주면사무소에서 심원계곡로를 따라 가다보면 성주초등학교 바로 옆에 커다란 공터가 나옵니다. 곳곳에 석탑과 비각이 있어서 눈에 쉽게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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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에는 꽤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낭혜화상탑비가 가장 먼저 눈에 띄고 보수공사중인 오층석탑이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세 개의 삼층석탑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석불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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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장 관심을 끄는 낭혜화상탑비로 가 봅니다.
 
정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비각 안을 거의 꽉 채울 듯 커다란 비석이 자리하고 있군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대사의 탑비가 보존되고 있는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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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비석 안에 비문이 가득 새겨져 있군요. 사실 이 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 중의 하나로 더 유명합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로서 그가 찬술한 4개의 비문을 말합니다. 이곳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쌍계사 진광선사 대공탑비, 초월산 대숭복사비가 그것인데, 이 중에서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개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 낭혜화상탑비에는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쓴 낭혜화상 무염대사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신라 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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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모니터링 및 보수정비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철망으로 둘러싸고 안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라서 그 웅장한 모습을 철골에 높이 걸린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6.6m의 이 석탑은 2중기단 위의 5층 석탑으로 넓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이 놓였고, 그 위에 중대석을 얹었다 하네요. 하층 기단의 약간의 손상을 제외하면 그 형태가 거의 완전하며, 석재구성에 규율성을 보였고 각층 체감의 비율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2중기단 위에 세운 3층 석탑과는 달리 2중 기단 위에 5층의 석탑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백제 탑과 신라의 탑이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합니다.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디 온전한 모습으로 보수 공사를 마치고 2021년 2월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날을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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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에는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 석탑에는 서삼층석탑, 중앙삼층석탑, 동삼층석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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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 서삼층석탑 지붕돌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는데, 이는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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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의 5층석탑 앞에 있는 높이 2.2m의 작은 석등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탑 앞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에 현재 위치에 조립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석탑보다는 뒤떨어진 형식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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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석계단의 모습입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이 계단 양쪽에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는데 그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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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금당 터에 있는 불대좌입니다. 위에 놓여 있었을 부처님상은 사라지고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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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석불입상입니다.

이 불상의 얼굴 모양은 타원형인데 심하게 풍화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민불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소박한 모습을 한 불상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충청남도 보령 성주사지(사전 제307호)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 있던 자리이며 발굴 조사를 통하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는 등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한 귀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서 둘러보고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피서를 위하여 성주산 계곡이나 자연휴양림을 찾을 때 잠시 이곳 성주사지에 들러 보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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