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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효행(孝行)이 만행(萬行)의 근본(根本)

역사 기록 최초의 효자 향덕과 이복의 효행을 기리는 공주 효심공원

2020.02.29(토) 01:08:33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날,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계룡도령은 공주에 사는 사람이라 '신바람 공주 활기찬 미래'를 기치로 내걸고 시민과의 소통에 우선하며 그 방편으로 신바람 시민 소통위원 100명을 선정 공주시의 행정과 업무에 대해 알리고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감도를 시정에 반영하는 신바람소통위원회에서 관광·문화분과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위원회 운영위원들만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공주시청을 방문했다가 철저하게 손 소독은 물론 체온 체크,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마스크도 쓰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냥 공주시청만 다녀왔다면 이야기할 것이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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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나처럼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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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활기를 띤 채 긍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2019 충청유교유물 기탁전'에서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을 다시 보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만 헛걸음이 되었습니다.

이곳 충남역사박물관 역시 코로나 19로 인해 휴관 중입니다. 더구나 민정희 박물관장은 충남도청에 출장을 간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되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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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공주시에서 코로나19 양성 확진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공주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점령당한 음습한 공포에 휩싸였었는데, 질병대책본부의 재검 결과 모두 음성으로 판명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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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쩔 수 없이 충남역사박물관 관람을 포기하고 충남역사박물관 아래 주차장 북쪽에 새롭게 자리한 공주 효심공원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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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공원(孝心公園)은 2016년 11월 15일 중동 281-5번지 일원에 조성된 공원으로 부지 1615㎡에 총 13억 4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효행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고 간직해 후세에 전하고자 2015년 12월 착공해 삼국사기 문헌에 최초로 기록된 효자 향덕과 국고개 전설의 주인공 효자 이복의 효행비와 비각을 옮겨 세우고 효행관련 상징 조형물인 효열문(孝烈門), 효원탑(孝元塔), 효행상(孝行像), 행복가족상(幸福家族像)과 건립기념비(建立紀念碑)를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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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공원은 충남역사박물관, 중동성당, 기독교 선교유적, 제민천, 풀꽃문학관, 우금티동학유적, 산성시장을 잇는 관광 인프라의 시작점으로 공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우리 삶의 근간인 효를 돌아보게 하는 교육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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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효가 무엇일까요?
갑자기 복잡해진 생각을 가지고 효자 이복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효자 이복(孝子 李福)
고려 후기의 효자 이복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공주목(公州牧) 인물조에 고려시대에 아전을 지낸 효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호서읍지(湖西邑誌)', '조선환여승람(朝鮮O輿勝覽)' 등에도 기록되어 있답니다.

직접 확인하지 않은 소개는 아주 조심스럽죠?

이복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던 중 어머니가 병이 들자 매일같이 읍내에서 밥과 국을 얻어다 따뜻하게 봉양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국을 끓이면 이복의 어머니 몫으로 한 그릇을 따로 떠놓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이복이 어머니에게 드릴 국을 얻어 고개를 넘어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국을 엎지르고는 굶주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하는데, 고려 조정에서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포상하고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효자이복지리(孝子李福之里)'라고 새긴 효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이 비석은 옥룡동의 비선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8년 이복의 효를 알리기 위해 발기인 이치하와 옥룡동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 산 7번지에 옮겨 세우면서 기존의 비석 외에 이복의 효행을 알리는 비석(신행적비 54×173×23㎝)을 새로 건립하고 1979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과, 그 내부에는 높이 162㎝ 너비 27㎝의 구비(舊碑) 및 높이 173㎝ 너비 53㎝ 두께 23㎝의 신비(新碑)를 나란히 세웠다가 나중에 다시 이곳 효심공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위 사진 중 오른쪽 비석이 옛 비석의 모습으로 비석(27×162㎝)은 화강암 재질로 석주 형태를 띠고 있으며, 앞면에는 효자 이복이 살았던 마을임을 나타내는 ‘효자이복지리(孝子李福之里)’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현존하는 정려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인 데 비하여 이복의 효자비는 흔치 않은 고려시대의 효자 표창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을 끕니다. 효자 이복비는 2009년 3월 16일 공주시의 향토문화유적 제34호로 지정되었으며 효심공원에는 원래의 비석이 보존 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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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주의 효자 향덕은 우리나라에서 문헌상 최초(서기 755년 통일신라 경덕왕 14년)의 효자에 대한 효행 기록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자신의 살을 잘라 아픈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이에 왕이 집과 토지를 하사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마을 이름도 ‘효가리’라 하고 널리 알려졌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효심공원의 두 비는 모사한 것으로 효심공원이 만들어지며 세워진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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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향덕(孝子 向德)
향덕(向德)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 때 자신의 살을 베어 모친을 봉양한 효자로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으로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타고난 천성이 온후하고 선량하였고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여 향리에서 부자의 인성과 행실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경덕왕(景德王 신라의 제35대 왕 재위 742∼765) 14년(755년)에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까지 겹치게 되었는데 이때 향덕의 부모도 역시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등에 종기가 나 거의 죽게 되었답니다.
 
이에 향덕이 밤낮으로 옷도 벗지 못한 채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부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 이를 끓여 드시게 하고, 어머니의 등창은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는 어머니에게 드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마을 앞 개울에서 고기를 잡다가 깨진 얼음에 상처를 입어 흘린 피가 냇물이 붉게 물들이자 후세 사람들은 이를 혈흔천이라 불렀고 쳔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말 공주 우금티에서 패한 동학군의 피가 흘러 혈흔천이라 불린다는 말과 상치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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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향사(鄕司, 고을 관리)가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여 나라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왕은 그 효행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 교서를 내려 조(租) 3백 곡(斛)과 집 한 채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 치하하고 지역 관청에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해 높이 기리도록 하였기에 지금도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하여 효자 마을 ‘효가(孝家)’, 효포(孝浦)라고 불린답니다.

이러한 향덕의 효행은 고려시대에는 물론 조선 후기에까지 전승되었고, 이런 효행을 따라 부모를 봉양하는 많은 효자 열부를 낳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에 세워져 있는 ‘신라효자향덕정려비(新羅孝子向德旌閭碑)’는 1741년(영조 17)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조영국(趙榮國)이 글이 새겨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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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특이한 형태의 탑으로 탑의 이름이 효원탑(孝元塔)인데…, 아무튼 그렇다구요.
 
대표사진부탁드립니다.

효심공원의 효행상(孝行像)에는 국그릇을 들고 울고 있는 효자 이복의 모습과 거북이, 학(두루미?), 사슴이 더해져 십장생을 향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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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의 가족이 어우러져 환하게 웃는 모습의 행복가족상(幸福家族像)인데 뒷모습이라 아쉽습니다. 얼굴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은 이유는 계룡도령이 아는 사람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충남역사박물관 담장을 따라 자리잡은 효와 관련된 부조의 모습도 함께 표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효(孝)는 행(行))의 근본이요 만행(萬行)의 으뜸이며 효는 행하는 것이지 책속에 있거나 입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는 효와는 방향이 조금 다르지만 효는 영원한 삶의 모듈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모두 효도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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