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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논산에서 사계 김장생의 뿌리를 찾다

기호유학의 중심 논산은 예악(禮樂)으로 조선을 이끈 주자학의 보고

2020.02.24(월) 22:48:02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 500년은 주자학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문, 종교, 사회, 정치의 모든 부분에서 예(藝)와 악(樂)을 중시하며 이어져 왔는데 그 예악(禮樂)의 뿌리를 사계 김장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기호유학의 중심이라 할 예악을 집대성하여 이를 생활 전반으로 녹여낸 사계 김장생을 있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충남 논산에서 사계 김장생의 뿌리를 찾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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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에는 유교문화와 관련된 유적이 참 많은데, 계룡도령이 그중에서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유적 중 광산김씨 가문의 오늘이 있게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논산 영사재(永思齋)와 모선재(摹先齋)를 소개하겠습니다.
 
충남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 마을은 작은 마을이지만 조선 왕조를 포함한 6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이 흐르는 마을로 조선시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을 비롯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문세가 광산김씨 세거지이기도 하답니다.
 
그래서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 사당과 묘역, 조선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의정공 김국광 사당과 양천허씨 재실 영모재, 영사재, 모선재, 김계휘 신도비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돈암서원을 비롯한 문화유적들이 있습니다. 
 
논산에서사계김장생의뿌리를찾다 2
 
영사재(永思齋)는 대사간공 김극뉴의 처 의령남씨(宜寧 南氏)를 제향(祭享)하고 있는 곳으로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관찰사공파-퇴촌공파 23세(世) 대사간공 김극뉴는 세종 18년(1436)에 출생하여 세조 14년(1468)에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에 급제하고 대사간과 병조참판을 지낸 의정공 김국광의 큰 아들로 조선조 전기 문신으로 자는 의백(義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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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벼슬은 음사로 청진 전직이 되었다가 찰방이 되었고, 남원으로 옮겼다가 1468년(세조 14) 춘장방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 종부시정을 거쳐 의빈부 경력이 되어 광릉군 이극배의 종사관으로 남방의 기근을 구제하는데 매우 공평하고 안정되게 하였다 합니다. 그 공로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어 오랫동안 판결사로 있다가 병조, 예조, 형조, 공조 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에 이르렀고 재직 중 병으로 사면하고 졸하시니 임금이 사재와 함께 부의를 2품으로 하사하고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동지 성균관사 광원군(光原君)에 추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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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10일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378호로 지정되어 관리·보전되고 있는 연산(連山) 영사재(永思齋)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1길 42에 자리잡고 있으며 숙종 15년(1689)에 처음 건립하였다고 하는군요. 재실(齋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삼문과 동재, 서재 등은 최근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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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남씨는 10세손 이후 공주와 논산 등지로 이거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전기부터 논산 지역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졌던 성씨로 연산의 거족 광산김씨와 혼맥을 맺었고 논산 지역과 관련하여 연무읍 고내리(당시는 전라도 여산) 봉곡서원에 남명한(南溟澣, 1543~1592)이 제향되었다는 기록과,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노성현에 거주하는 남건로(南建老)가 1762년(영조 38)에 생원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령남씨는 누구일까요?
성균관(成均館)의 정9품(正九品) 벼슬인 직학(直學)을 지낸 남간(南簡)의 세 아들 남준(南俊)·남척(南倜)·남건(南健) 중 진천현감을 지낸 남척(南倜)의 5남 5녀 중 한 사람으로 김극뉴의 본처인 함양박씨(咸陽朴氏)가 2남 2녀를 낳고 세상을 떠나자 그 처갓집에서 의령남씨를 재취로 중매해 자손 없이 살다가 1525년(중종 20)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8대손 진옥이 묘갈명을 지어 비를 세우고 후손들이 묘소 바로 아래 지금의 자리에 영사재를 지어 덕을 추모했다고만 전해집니다.

어쩌면 후처로 들어와 자식이 없이 살다간 것이라 마땅히 제사를 모실 자손들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제실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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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의 뒤쪽 50m 정도 거리의 구릉 동향 경사면에 의령남씨의 묘소가 있는데, 묘비, 문인석, 석등,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고, 묘비명은 새로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영사재 뒤편 의령남씨 묘소의 왼쪽에 있는 와가(瓦家)는 숭원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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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재의 솟을 삼문을 나와서 이번에는 모선재로 향했습니다.

영사재에서 200m 가량 떨어져 김국광 사당 입구에 있으며, 1989년 4월 20일 충청남도 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어 있는 모선재(慕先齋)는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金繼輝)와 황강 선생의 아버지인 지례공 (知禮公) 김호(金鎬) 두 사람을 모시는 재실로 자손들이 조상을 숭상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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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작지붕 민도리집인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좌측면 1칸을 제외하고 전면 3칸을 길게 마루로 설치하였고, 맨 우측 1칸은 부엌으로 쓰고 중간 2칸은 방으로, 그리고 맨 좌측칸은 대청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와 양식의 일반 건물이면서도 재실인 특이한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중앙과 오른쪽의 기둥 3개는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왼쪽의 두 기둥은 네모 기둥을 사용하여 아주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등 재실 건축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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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재 오른쪽에 있는 정면 3칸 건물의 모습으로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데 건축 시기는 모선재처럼 알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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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재에는 여느 기와집과는 달리 다양한 문들이 있어 보물찾기를 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랍니다. 여러분도 한 번 찾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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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양쪽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재실 외삼문입니다.

사계 김장생의 조부 김호는 음보로 선공감주부와 지례현감을 지냈고, 평소 학문에 힘썼으며 추만(秋巒) 정지윤(鄭之雲)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며 교유하였는데, 특히 역학과 성리학에 밝았으며 학문에 대한 열의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아들 김계휘에 이르러 비로소 사류의 대열에 오르면서 명문가로서의 명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김호는 빈객을 잘 접대하는 인심이 아주 후덕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으로 어느 겨울날 남루한 복색의 선비가 찾아와 유숙하기를 청하여 저녁상을 차려주었는데, 그 선비가 따로 수저와 그릇을 청하여 밥을 덜어놓고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김호가 의아해 선비에게 그 연유를 묻자 선비는 “오늘이 어머니의 제삿날이지만 집 한 칸 없는 몸인지라 이렇게라도 제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김호가 며느리를 불러 3채 5어를 준비하여 정성껏 제사상을 새로 차려주자 선비는 “이렇게 따뜻한 제사상을 어머니께 올리는 것이 처음”이라며 눈물을 흘리고 감사를 표하고 떠났고, 8년 후 김호의 꿈속에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8년 전 이 집에서 처음으로 제삿밥을 제대로 대접받았습니다. 그 고마운 은혜를 갚기 위해 옥황상제께 8년간 기도하였더니 구슬 두 개를 내리며 은혜에 보답하라 하기에 이 구슬을 드리니 집안에 수태가 있으면 한 개씩 삶아 먹이면 혈식군자(학식이 높은 큰 인물을 칭함)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해 김호는 그 구슬을 받아 농안에 넣고는 꿈을 깼는데, 지난 밤 꿈이 하도 생생하여 농안을 들여다보니 실제로 구슬 두 개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제사상을 차렸던 며느리에게 태기가 있어 구슬 하나를 삶아서 먹였는데 김장생이 태어났고, 김장생의 며느리에게도 나머지 하나를 먹여 김집을 낳았다고 전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전하는 전설 때문이 아니어도 사계 김장생의 탄생은 조선을 위해 충분히 가치가 있었습니다.

어떤 가문이 번성하고 떠오르는 것은 분명한 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희생도 반드시 있었습니다. 작금의 명성만을 쫓을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희생도 찾아보면 새롭게 역사를 이해하게되지 않을까요?

이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사실보다는 집요하게 검색을 해서 얻은 자료들과 나름의 이해 방법으로 정리를 해 보았는데,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떠신지요? 아이들 숙제 자료로 이용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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