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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임진왜란의 명장 김시민 장군

2019.10.26(토) 16:17:08 | 가람과 뫼 (이메일주소:caption563@naver.com
               	caption56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무공 동상
▲충무공 동상

장군의 관향은 안동이며 자(字)는 면오(勉吾) 이다.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2세 손이며, 구암 김충갑 선생의 셋째 아들로 천안군 병천면 가전리 백전에서 1554년(명종 9년)에 태어나셨다 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특히 병정놀이를 즐겨 하셨다 한다. 전하여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장군이 어렸을 적에 마을에서 동네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는 중 고을 원님의 행차가 있었다 한다. 원님의 행차가 진중을 지나려 하자 장군께서 나서서 '아이들의 놀이라 하지만 장수가 병사를 지휘하는데, 진중을 무단으로 통과할 수가 있느냐' 호령을 하였다 한다. 이에 관속이 나서서 '원님 행차 중이신데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며 호통을 치는데도 장군께서 전혀 굽히지 않자 이를 바라보던 원님이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라의 큰 재목감이라 하며 길을 비켜 지났다 한다.
 
사사처
▲사사처
 
유허비
▲유허비
 
장군의 후손에 연락 드려 잠시 짬을 내어 동행을 부탁을 드린 후 장군이 탄생하신 병천 가전리를 찾았다.

과거에는 후인들이 장군의 공을 흠모하여 사우를 세웠다 하는데 지금은 유허비만이 덩그라니 남아 있다. 유허비 아래에는 장군께서 9살 때에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던 이무기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사사처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영모제
▲영모제

유허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제실을 찾았다. 선조 17년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장군은 훈련원 주부를 받아 봉직하였는데, 200여 년의 태평성대로 인하여 군기는 무너지고 병기는 녹슬었음에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이에 개선을 건의하였다 한다. 이에 병조판서가 평화로운 시대에 백성들의 불안감을 일으키는 무모한 일이라 탓하며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장군께서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낙향하셨다 한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1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2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3
 
영모제 초입에는 공의 모친이신 창평 이씨의 묘비와 안내 문구가 남아 있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4

충무공(忠武公)은 이순신 장군의 호가 아니라 본래 무인으로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신 분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시호이다.
 
1590년 장군께서 진주판관으로 부임한지 2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부산성과 동래성이 왜군에게 무너지고 나라가 흉흉해질 무렵 순찰사의 명으로 부재 중인 진주목사 직무를 맡은 장군께서는 군사를 수습하고 화약을 제조하며 대포를 제작하는 등 무기를 정비하여 진주성 방어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진주성이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라 판단한 풍신수길이 여러 달의 준비를 거쳐 1592년 10월 4일 2만여 명의 왜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에 파죽지세로 물밀듯 밀려왔을 때 3천8백여 명의 민·관·군이 일심동체로 지휘하여 성을 방어하며, 밖으로는 임계영·최경회가 이끄는 2천여 명의 의병이 합세를 하여 대치하는 등 혼신을 다하여 진주성을 지켜내었다.

동·서·북 삼면에서 밀려온 왜군과의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럼에도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왜군은 지휘관 300여 명과 병사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하였다. 당시 왜군의 무기는 조총이 주무기임에 장군께서는 현자총통, 승자총통,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하여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패퇴하게끔 하였다.

공이 승리를 거두던 날 성안을 순시하던 중 시신 중에 숨어 있던 왜군이 쏜 흉탄에 이마를 맞으셨다 한다. 관사에 돌아오신 장군께서는 이마의 총탄을 제거하도록 하고, 시약(時若)을 불러 '네가 나의 일을 맡아 군무를 대행하다가 후임자가 오거든 발상(發喪)하라' 하고 향년 4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한다.

임진왜란 삼대첩인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중 육전에서 최초의 승리를 이끌어낸 장군은 난이 끝난 후 13년인 을사년에 와서 선무공신 2등 상락군에 봉하여졌다가 후일 그 후 전승 실적이 밝혀짐에 따라 110여 년 만인 숙종조에 이르러 당시 영의정인 이유의 장계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상락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충무공 시호와 시장이 내리어졌다 한다. 또한 조정에서는 특별 사면권을 주는 철권(鐵券)을 내려 후손들을 특별히 예우하였다 한다.
 
홍살문
▲홍살문 
 
충무공 묘소
▲충무공 묘소
 
현재 괴산군에 있는 장군의 묘소는 본래 충주에 있었는데,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한다. 오가는 이 없는 묘역에는 어쩌다 찾아온 객이 반가운 듯 문화해설사께서 반색을 하신다. 사당과 묘역을 둘러보고 장군 영정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장군의 나라 사랑하시는 마음이 모두의 가슴에 영원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충무공 영정
▲충무공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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