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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금산의 4대하천 유역을 중심으로...봉황천(새내유역) 제원면(조정천)

2019.10.14(월) 14:55:45 | 금산신문 (이메일주소:gsnews4700@naver.com
               	gsnews4700@naver.com)

이흔이재 첫동네로서 사과재배로 마을을 특성화시킨 바리실마을 전경.
▲ 이흔이재 첫동네로서 사과재배로 마을을 특성화시킨 바리실마을 전경.

봉황천 45㎞를 따라 나선 후 어느덧 마지막 부락을 찾았다. 제원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동쪽에는 산 높이 480m의 발군산이 주봉을 이루면서 산의 흐름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서쪽으로도 산이 연이은 그 사이로 북쪽으로부터 흘러오는 조정천의 유역에 넓은 들이 조성되어 비교적 평야지대를 이루는 곳에 명곡리가 위치한다.

가구수가 많지 않은 조양마을에 담장을 비롯하여 우물가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가구수가 많지 않은 조양마을에 담장을 비롯하여 우물가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 가구수가 많지 않은 조양마을에 담장을 비롯하여 우물가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제원리에서 북쪽으로 종해서 군북면으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명곡리의 중앙을 뚫고 이어져서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동곡리로 통하는 등골재가 있어서 산길이 놓여지고, 서쪽으로는 군북면으로 넘어가는 일흔이재가 있어서 옛날에는 그 고개를 넘어 다니는 힘든 보행이 따랐던 지역이기도 하다. 인류의 정착은 고려 이전으로 본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들이 개간되고 취락이 형성되었다가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임진왜란 때의 국난에 밀리어 명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즉 천안전씨(天安全氏), 나주나씨(羅州羅氏), 장수황씨(長水黃氏)등이 모두 이에 기인하여 정착한 씨족들이다. 더욱이 제원에 역(말)이 들어서면서 명문들은 그 인집지역에서 산골로 그 정착지를 더욱 깊숙히 파고 들었다는 사실은 세진을 잊고 삶을 누릴려는 낙망과 소지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비극적이다. 권자와의 거리를 절단하는 아픔과 함께 태평을 스스로 자초한 정착이었다.
 
금산의4대하천유역을중심으로봉황천새내유역제원면조정천 1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동일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바리처럼 되었으므로 바리실, 변하여 명곡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구상리, 구억리 일부를 병합하여 명곡리라 한다.

일흔이재를 기반으로 자리한 바리실마을은 금산에서 드물게 사과재배를 많이 하는 곳이다. 이곳의 국지적 기후와 비교적 얕은 구릉지형이 과수재배로 적합한 탓이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 스스로 지역발전과 농촌산업의 경쟁력 고취와 산업의 다각적 변모등을 통한 생활 자력 기반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부락의 전체 주민이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조성하여 박인호 대표를 중심으로 사과와 농촌문화를 중심으로 도시민과 어린이등을 상대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용중이다.
 
국사봉자락에 걸쳐 앉은 명곡리 구상마을 전경.
▲ 국사봉자락에 걸쳐 앉은 명곡리 구상마을 전경.

같은 명곡리에 속하나 지리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을 갖고 있는 구상마을에서는 국사봉에 의탁하여 다양한 산야초를 재배하고 자연 임산물들 재취하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마을의 주거형태도 비교적 전통주거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어 방문자에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명곡리의 이곳 저곳 찢겨진 산하를 뒤로하고 내려 오면 발군산을 기점으로 한 산악지대이며 서쪽으로는 넓은들이 펼쳐진 지역에 구억리가 자리한다. 동쪽으로는 대산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수당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제원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동곡리, 명곡리와 경계를 한 지역에 있다.
 
국사봉 건너편에 앉은 동곡리마을, 한 때 척박한 환경마저 극복시킨 농수로 시설이 저멀리 보인다.

국사봉 건너편에 앉은 동곡리마을, 한 때 척박한 환경마저 극복시킨 농수로 시설이 저멀리 보인다.
▲ 국사봉 건너편에 앉은 동곡리마을, 한 때 척박한 환경마저 극복시킨 농수로 시설이 저멀리 보인다.

옛날에는 깊은 산골이었으나 근래에 와서 군북면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놓여지고 또한 그 도로가 포장됨에 따라 교통이 편리해진 지역이다. 그러나 마을의 깊은 내력을 듣다보면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며 이마를 치곤한다. 이유인 즉슨 마을에 신작로를 내면서 부락발전기금이란게 지원되는데 당시에 이를 놓고 주민간 폐가 나뉘어 그 갈등이 지금도 잔존하고 있단다.

이유야 어떠하던 구억2리 마을은 아직도 근대유산이 더러 남아 있어 보존의 가치도 있어 보인다.

동곡리는 구억리를 지나 제원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북쪽에는 해발 667m의 국사봉이 주봉처럼 우뚝 서고 그 곳을 기점으로 산과 산이 남쪽으로 주행하면서 사이사이에 들을 조성하고 전답과 촌락이 판점처럼 놓인 곳이다.  

동쪽으로는 길곡리와, 그리고 군북면 천을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구억리, 대산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군북면 두두리, 산안리와 경계를 나누는 지역에 자리한다. 또한 서쪽에는 조선시대 영조 4년(1728)에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일대에서 준동하던 정희량의 난을 진압하는데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였던 의병들이 처음 모여서 떠났던 해발 480m의 발군산이 우뚝 서서 동곡리 일원의 민족적 정기를 드높여 주기도 한 지역이다.
  한때는 영화로워 보였음직한 근대건축물이 아직도 잔존하여 있는 구억리 마을 전경
▲ 한때는 영화로워 보였음직한 근대건축물이 아직도 잔존하여 있는 구억리 마을 전경


육칠십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억리의 이발소 전경(현재는 영업하지 않는다)
▲ 육칠십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억리의 이발소 전경(현재는 영업하지 않는다)

구억리를 기점으로 길곡리를 거쳐 신안리로 들어가는 도로가 길게 동곡리를 지나고 있으나 여전히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아니다. 옛날에는 동쪽으로는 새방이에서 길곡리로 들어서기 위해서 노루개재를 넘어야 했고 서쪽으로는 건너말에서 명곡리로 넘어가는 조박골재를 통해서 동서로 왕래를 했으며 오직 남쪽으로는 순탄한 재를 넘어 왕래를 했던 산골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동일면의 지역으로서 오동나무가 많으므로 동골 또는 동곡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신방리를 병합하여 동곡리라 하고 가호는 66호이며 인구는 225명이다.
 
천앙봉 산자락에서 내려다 본 대산리 마을 전경과 그 너머로 켜켜이 겹쳐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산들의 어우러짐이 한폭의 산수화로 전개된다.

천앙봉 산자락에서 내려다 본 대산리 마을 전경과 그 너머로 켜켜이 겹쳐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산들의 어우러짐이 한폭의 산수화로 전개된다.
▲ 천앙봉 산자락에서 내려다 본 대산리 마을 전경과 그 너머로 켜켜이 겹쳐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산들의 어우러짐이 한폭의 산수화로 전개된다.

대산리는 금산군의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와서 금강으로 들어가는 봉황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 북쪽으로 펼쳐지는 들과 북쪽으로는 산 높이 502m의 천앙봉, 남서쪽으로 그 준령과 함께 산악지대가 이어지는 지역에 자리한다. 들과 산이 잘 조화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 하천유역의 표본 같은 농촌지대다. 동쪽으로는 천내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구억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제원리와 그리고 봉황천을 건너 저곡리와 경계를 나눈다.

북쪽이 산악지대여서 북동쪽에는 신안리로 통하는 신안골 골짜기와 동쪽으로는 새새골 골짜기와 서쪽으로는 배내미 골짜기와 동북쪽으로 무낭골 골짜기가 있으며, 동곡리로 넘어가는 동골고개, 잿말고개, 덩골 골짜기가 있는 반면에 남쪽에는 동무들, 등시피들 등 들이 펼쳐져서 풍부한 수원과 함께 곡창지대를 이루는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상당히 빨라서 선사시대 신석기시대로 본다.

조정천을 끝으로 굽이굽이 흘러온 봉황천과 합수되어 저 멀리 보이는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

▲ 조정천을 끝으로 굽이굽이 흘러온 봉황천과 합수되어 저 멀리 보이는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


조선시대에 이 농원에 정착한 씨족은 풍천노씨(豊川盧氏)로 그 처음을 전하나 그 후예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뒤에 정착한 김해김씨(金海金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대대로 대를 이어오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북면의 지역으로서 천앙봉 아래가 되므로 큰 산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한묘 또는 대산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가호수는 117호이며 인구는 448명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세거하며 전주이씨(全州李氏)도 많은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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