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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500년 풍파를 견뎌낸 서산의 해미읍성을 거닐다

2019.05.16(목) 12:51:56 | 네잎클로버 (이메일주소:venusmi8@hanmail.net
               	venusmi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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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사적 제116호)

얼마 전, 서산 여행 중 해미읍성을 찾았습니다. 주말을 맞이해 오전 시간부터 해미읍성 일원은 많은 분들로 북적북적 활기가 넘쳐났는데요, 주차 후 성벽을 따라 읍성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인 진남문 쪽으로 향했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성벽, 크고 작은 투박한 돌들이 쌓인 소박한 풍경은 지나온 역사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시대 역사의 현장인 해미읍성을 선조들의 숨결을 따라 아이들과 천천히 거닐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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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정문(진남문)

해미읍성은 상시 개방되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해미읍성 안에는 진남문, 민속가옥, 동헌, 객사, 청허정, 옥사, 회화나무 등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500년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진남문으로 들어서면 성 안쪽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바침돌 중앙에는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1491년(성종 22년)에 진남문이 중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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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긴 돌담이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읍성을 둘러보기 전, 해미읍성에 관한 역사를 잠시 살펴 보았는데요, 해미는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을 갖춘 군사 요충지로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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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규모는 둘레 1.8㎞, 높이 5m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보존이 잘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태종 때 당시 해안 지방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세종 3년)까지 축성을 완성하고, 그 후 해미에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 기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며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지휘하였습니다. 1652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하면서 1650년대 효종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충청병마절도사가 주재하던 국방의 요충지였는데요, 이후 충청도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고, 영장(營將)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면서 읍성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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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머문 적이 있습니다.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이 1576년(선조 9)에 무과 급제하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 번째 관직으로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 간 근무한 곳입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당시 천주교의 교인이란 죄명으로 이곳 해미읍성으로 열흘 간 귀양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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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을 즐기는 모습
  
조선시대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해미읍성, 동헌을 향해 걷다 보면 우측으로 키가 큰 '회화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는 일명 '호야나무'라고도 불리는데요, 1790~1880년대에 해미읍성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호야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집니다. 호야나무 살결에는 하얀 원 모양이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철사 줄이 박혀 있던 흔적으로 해미읍성의 아픈 역사를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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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은 가야산 내포문화 일대의 중심지로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졌는데요,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 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천여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호야나무 바로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 두었던 옥사가 자리합니다. 옥사는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곳을 발굴하여 복원, 재현하였습니다. 1790년부터 100여 년 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투옥하거나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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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옥사)

옥사에서 나와 동헌으로 발길을 돌려봅니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중심 건물인데요, '호서좌영'이라는 현판이 걸린 누문을 통과하면 관찰사·수령이 파견되어 근무하던 동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위치한 집'이라는 뜻으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이곳에서 행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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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으로 들어서는 호서좌영 관아 정문
 
500년풍파를견뎌낸서산의해미읍성을거닐다 13▲해미읍성(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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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관아에서 우측으로 계단을 따라 오르면 구릉 위에 '청허정'이 자리합니다. 청허정은 1491년 (성종 22)에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지은 정자로 '맑고 욕심없이 다스리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활을 쏘며 무예를 익혔고, 문객들이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현재는 많은 관람객들이 해미읍성의 오랜 역사의 흔적을 찾아 둘러보고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청허정은 그 주변으로 송림들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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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정
 
아이들과 모처럼 조선시대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해미읍성을 찾아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 보았는데요, 서산의 해미읍성은 당일치기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는 곳으로 가족 나들이 장소, 역사탐방지로도 최고인 듯합니다. 주말여행 계획하고 있다면 500년의 풍파를 이겨낸 서산 해미읍성을 찾아 조선시대 분위기 제대로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다양한 체험도 즐기고 청허정 뒤편 솔숲을 걸으며 호젓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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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읍내리 491)
-관람시간: 3월~10월 (05시~21시)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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