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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반인륜적인 악마들의 짓”

중리 유해발굴...유해의 95%가 어린아이와 여자

2018.04.06(금) 13:44:19 | 관리자 (이메일주소:ionyang@hanmail.net
               	ionyang@hanmail.net)

중리 민간인학상 유해발굴(5)

한국전쟁기에 학살 당하고 암매장 됐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지난 222일부터 배방읍 중리 세일금광 터에서 진행돼 330일 종료됐다. 이 작업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진행하는 작업으로 아산시가 일부 재정을 지원하고 있어 특히 의미가 있다
.

이에 온양신문은 이 발굴작업 및 한국전쟁기 아산 지역에서 전개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자료를 토대로 연재해왔으며 이번 회를 끝으로 마친다. <편집자
>

발굴된 유해, 유해들. 95%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 발굴된 유해, 유해들. 95%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원(속칭 세일금광)의 유해발굴작업은 지난 222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진행됐다. 초기에 발굴현장에서는 지표면을 호미로 가볍게 긁어내기만 했는데도 쏟아지는 유해를 발견하면서 일이 더 커질 수도 있겠다 싶었고, 실제로 작업이 종료되기 수 일 전까지만 해도 유해가 넓고 깊게 퍼져서 발견돼 자칫 발굴작업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것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325일 오후 4시경 바닥의 생땅이 드러나면서 발굴작업은 종료를 준비했고. 공식적으로 지난 330일 현장에 대한 원상복구를 마친 후 발굴작업은 종료를 선언했다. 38일간이었다.

25일 실질적인 발굴작업이 종료되던 시점에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지금까지 수습한 유해는 약 150여구이며 그중 여성과 어린아이가 7할이고 나온 비녀만 50개가 넘었으며, 어린아이의 유치가 너무도 많이 나온 것이 이번 유해발굴의 특징이었다. 이건 이념대립을 넘어 반인륜적 범죄의 현장 증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실질적인 발굴작업이 종료되고 일주일 여가 지난 뒤 점검한 결과 발굴 유해수는 대략 187구로 파악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수치가 아니고 최종감식후 약간의 조정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해의 상태와 함께 발굴된 유품 등으로 미뤄 발굴 유해의 95%가 여성과 어린이로 추정되고 특히 16세 미만의 어린아이로 추정된 유해수만 최소 54구라고 했다. 대체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이 빨갱이가 뭐고, 무슨 이유로 이런 산골짜기까지 끌여와 죽어야 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 작업에 참여한 단원의 울분에 섞인 외침이었다.

특히 이렇게 현장에 어린이와 여성의 유해가 다수 발굴된 것은 부역혐의 등으로 남자들은 따로 끌고가 처형하고 이곳에는 주로 그 혐의자의 가족 등을 대상으로 도민증을 새로 발급해준다고 속여 끌고와 살해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현장은 폐광이 있던 자리로 대략 가로*세로*깊이 각 5m 정도의 구덩이 형태였던 것으로 미뤄 전체 인원을 한꺼번에 살해한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끌고와서 총살하고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그 뒤로 또 총살하고 쌓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마구 내버린 것 같다고 추정했다. 그래서 유해들이 마구 꺾이고 부서진채 발견되고 있는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이번 발굴작업에 발견된 유품은 비녀 81, 카빈소총의 탄두와 탄피,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탄알이 가득찬 탄창까지 발견됐다. 게다가 유해의 손가락에 그대로 끼워져 있는채로 발견된 가락지, 귀후비개, 약통, 아이들의 놀이기구인 구슬, 어른의 고무신……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고, 참혹힌 학살의 현장이었다.

일반인으로 현장을 방문했던 한 시민은 적국의 민간인이라도 저렇게 학살하지는 않았을텐데자기 민족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저런 식으로 죽여서 버리다니악마들의 짓이라고 할 수 밖에라며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배방읍 중리 유해 발굴작업은 공식적으로 222일부터 330일까지 진행됐다. 동원인력은 전문 발굴단을 비롯해 자원봉사자 포함 연 800명이 나서 휴일도 없이 강행했다.

향후 일정은 4월중으로 감식작업을 마무리 한 후 5월경 발굴보고대회를 가질 예정이며, 발굴된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후 약 2년 뒤 최종적으로 대전에 별도의 추모공간을 설치한 후 안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편 이번 배방읍 중리 유해발굴작업은 민간인희생자 아산유족회, 민간인희생자 유해발굴공동조사단,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발굴 아산대책위 등이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제반 비용은 아산시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관계자에 따르면 발굴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산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당초 산주와 발굴 조건으로 원상회복을 약속했었기에 작업 종료후 포장재를 덮어 현장 보존 조치를 한 후 흙을 덮어 원상회복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추후 현장에 추모비 설립도 고려중이라고 덧붙였다.

아산부역혐의사건의 위법성 여부와 책임 유무

아산지역 부역자 살해는 1950
926~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부터 1950929일 경찰 선발대가 입성하기까지 각 면·읍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에 의해 시작돼 1950104일 아산경찰서의 복귀 후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한국전쟁 직후 부역자 처리의 법적 근거는
195062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었으나, 이 포고령에 의해 극형이 남발돼 실제로 수많은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살해되거나 재산침해를 받았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국회는
1950917일 사형금지법안과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을 제정하여 통과시켰지만 정부는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과도한 부역자 처벌에 따른 문제점이 나타났다
. 19501014일에는 헌병사령관 장창국 대령이 청년단체는 군·경 수사기관에 협조임무 밖에 없으며, 부역자라 할지라도 불법구속해 구타를 할 때는 그 책임자는 물론 담당자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치안대(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는 수복 이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부역혐의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체포해 구타하고 살해했다.

아산지역의 희생자들을 연행해서 처형한 자들은 주로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이었다. 이들은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처형을 집행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온양경찰서장에게 가해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충남경찰국에도 지휘감독책임이 있으며 공권력의 불법행사를 막지 못했던 이승만 정부에게까지 책임이 귀속된다.

특히 배방면 사건의 경우 당시 국무총리에게까지 신속하게 보고될 만큼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지만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전쟁이 끝난 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등 언론에서 배방·신창 사건이 보도되고 신창지서주임 유○○이 기소되기까지 했지만 검찰과 경찰,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 희생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희생자의 특성에서 확인한 것처럼 희생자는 일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과 그들의 가족이었다
. 당시 부역혐의자들은 적법한 조사나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희생됐으며 그 가족들은 마을 회의혹은 도민증 발급이라는 연락을 받고 소집됐다가 이유도 모른채 살해됐다.

따라서 경찰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집단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반인권적·반인륜적 국가범죄에 해당한다.

2월 22일 있었던 개토제. 원혼들이 놀라지 않게, 이제 밝은 세상으로 나오시라고 제를 올렸다.

▲ 2월 22일 있었던 개토제. 원혼들이 놀라지 않게, 이제 밝은 세상으로 나오시라고 제를 올렸다.


초기부터 쏟아져 나오던 유해들, 넓고 깊게 발견돼 장기작업으로 이어질까 우려가 컸었다.

▲ 초기부터 쏟아져 나오던 유해들, 넓고 깊게 발견돼 장기작업으로 이어질까 우려가 컸었다.


초기부터 쏟아져 나오던 유해들, 넓고 깊게 발견돼 장기작업으로 이어질까 우려가 컸었다.

▲ 초기부터 쏟아져 나오던 유해들, 넓고 깊게 발견돼 장기작업으로 이어질까 우려가 컸었다.


발굴된 유해들. 무려 180여구(추정)가 넘었다.

▲ 발굴된 유해들. 무려 180여구(추정)가 넘었다.


3월 30일 공식적으로 발굴작업을 종료하고 위령 의식을 가졌다.

▲ 3월 30일 공식적으로 발굴작업을 종료하고 위령 의식을 가졌다.


산주와의 발굴조건대로 현장은 보호조치를 한 후 복토됐다. 이곳에는 추모비 등 기념 조형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 산주와의 발굴조건대로 현장은 보호조치를 한 후 복토됐다. 이곳에는 추모비 등 기념 조형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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