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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고추를 말리며…

2016.12.30(금) 23:40:4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삼삼오오 할머니들이 모여 앉은 평상에서 작년보다 강력한 땡볕에 푸념으로 스트레스를 날린다.

사과는 볕에 데어서 작황이 안 좋다 하고 감나무에 아기 주먹만큼 자란 감들은 투둑 툭 땅에 떨어져 겨우 대여섯 개의 감들만이 나무에 붙어 있다. 비가 안 와 목마른 어린 감들이 버티며 견디다 결국은 지고 만 것이다.

그런 중에도 고추만큼은 잘 자라서 붉게 익었고 말리기도 딱 좋다.

여기저기 널찍한 공간에는 빨간 고추를 널어서 햇볕에 바삭바삭 잘 마른다. 지나가는 비조차 없어서 옥상 가득 널어 둔 고추가 제대로 말랐다고 좋아하는 옆집 아줌마는 신났다.

고추 말리는 향기는 지나가는 이의 머리를 맑게 해준다. 매콤한 듯 들큼한 향기 속에는 햇볕이 녹아든 상쾌함마저 느껴진다.

내 어릴 적 벼농사는 품앗이로 서로 돕고 남자들은 논에서 일하고 여자들은 고깃국 끓이고 갈치조림을 만들며 풍년농사를 위해 큰일을 했다. 

동네사람들과 쌀밥 잔치를 벌이고 고된 농사를 행복하게 치렀다.

빨간 고추 농사는 또 얼마나 매혹적인 빛깔로 우리들의 눈빛을 사로잡고 깔끔한 양념이 되어 주었던가!

손가락만한 고추모를 심고 물 주어 가꾸면 고추 모는 그 정성을 알고 부쩍부쩍 자란다. 흰 꽃이 앙증맞게 귀엽다 싶었는데 푸른 고추가 열리고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은 신비롭다.

추석 무렵 온 가족이 모였을 때 풍성한 식사 후 밀짚모자를 쓰거나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너도나도 고추밭으로 들어간다.

밭고랑마다 들어가 고추를 따면 포대에 쌓이는 무게감에 즐겁다. 굵은 땀방울이 자꾸 흘려도 탐스런 붉은 열매를 따고 또 따면서 내 마음도 익어가는 듯 감미로운 착각에 그리 즐거웠던 게다.

땀과 함께 수확한 붉은 고추 포대를 안고 나오는 친척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기분 좋은 피로조차 아름답다.

부엌에서는 텃밭에서 갓 따 온 가지는 적당히 잘 물러 맛난 양념으로 버무리고 연두빛 호박은 새우젓 넣고 볶아 감칠 맛나게 삼삼하다.

얼큰한 두부찌개랑 여럿이 나누는 점심은 꿀맛이다. 여러 해가 지나도 추석 때 고추 따던 날의 따스한 추억을 잊지 못한다.

고추를 딸 때는 다만 즐거웠지만 이제 마당 가득 널린 고추를 말리는 일은 끈기가 필요하다. 오늘 실컷 햇볕을 쬐었건만 통통한 몸매는 변화가 없다. 내일 또 조금 말리고 거의 한 달을 말려야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예쁜 빛깔의 마른 고추가 된다.

도중에 소나기라도 만날세라 온 가족이 신경 써서 말린 고추는 가을 김장 양념으로 으뜸이다.

올해는 팔월 내내 비 한 방울 내비치지 않아서 옥상에 고추를 쫙 널고는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날 쯤 지나 올라가 보니 고추는 투명하게 속살을 내비치며 달강달강 노란 고추씨를 품었다.

고추 말리기 딱 좋은 올해는 고추 풍년이다. 다른 작물들은 힘이 없어도 고추가 저리 풍년 인만큼 올 김장도 먹음직스러울 게다. 오뉴월 지나 칠 팔월 땡볕은 고추를 위하여 큰일을 했다.
/박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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