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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마지막 백제시대 사비성 왕궁터로 추정

부활하는 백제왕국(3)-관북리유적지와 부소산성

2015.08.27(목) 19:00:49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부소산성은 106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부여의 진산으로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그 주위에는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다. 부소산 정면 아래쪽에는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 부소산성은 106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부여의 진산으로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그 주위에는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다. 부소산 정면 아래쪽에는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소산성
북쪽·동쪽 가파르고 백마강 흘러
퇴뫼식·토곡식 혼합해 성곽 축조
 
관북리 유적지
임금이 마시던 우물 ‘팔각정’ 출토
건물터·도로·하수구 등 유구 확인

 
 
國破山河異昔時(국파산하이석시)
獨留江月幾盈虧(독유강월기영휴) 
落花巖畔花猶在(낙화암반화유재)
風雨當年不盡吹(풍우당년불진취)
 
나라가 깨어지니 산하(山河)도 예와 다르고
홀로 남은 강월(江月)은 차고 기울기 몇 번인가
낙화암 절벽의 꽃만은 여전히 피었으니
그 해에 불던 비바람도 그치지 않았구나.

 
조선 숙종대의 사람 석벽 홍춘경이 낙화암에 올라 읊은 칠언절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 승자만을 위해 쓰인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방탕에 빠진 왕이 아니었으며, 낙화암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는 당나라에 끌려가느니 죽음을 택한 민초들이었다.

홍춘경은 낙화암에 올라 백마강에 비친 달을 보면 찬란했던 백제의 혼을 그렇게 회상했다.

백제의 고도 ‘부여(夫餘)’에 들어서자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모처럼 여름 무더위를 시원하게 씻어 내리듯 해상왕국 백제의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차창과 보닛을 때리는 빗소리는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오악사의 연주처럼 경쾌하게 들렸다.

고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이 부소산(扶蘇山)이다.
해발 106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 있는 부여의 진산이다.

백제가 당나라·신라의 연합군과 마지막 전투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이 흐르고 있어 천혜의 요새다.

부소산의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였다.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백제왕실에 딸린 후원 구실을 하였으며, 전쟁 때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부소산 내에는 군창지,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 고란사 등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산이다.

부소산의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았다.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사적 제5호이다.

부소산성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1957년에 처음 세워졌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5분 남짓 더 걸어가면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東臺)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자루(泗疵樓)가 있다. 한자가 ‘사비’(泗比)와 비슷하나 왜 사자루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백제 때에는 송월루(送月樓)가 있었으니 해맞이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 길 왼쪽에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한번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이곳에는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적 금슬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 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보니 웬 갓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아차 했다. 도사가 한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부소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오른편에 위치한 것이 관북리 유적지다.

1983년 9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43호(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었다가 관북리 725번지 일대를 포함하여 184필지 9만5048㎡를 2001년 2월5일 사적 제428호로 변경하였다.

관북리 일대는 백제의 왕궁터와 고려·조선시대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왕궁터는 부여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입지조건으로 보아 백제왕궁지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궁터의 범위는 동쪽은 부여여자고등학교 앞 동쪽의 쌍북리 와요지, 서쪽은 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은 논산 방면의 길가, 북쪽은 부소산 남쪽 기슭을 한계선으로 추정된다.

왕궁터에서는 건물터·도로·하수구·연못·석축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현재 부여여자고등학교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백제의 어정(御井)인 팔각정(八角井:충남문화재자료 103)이 있다.

연못은 직사각형의 활석으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약 6m, 깊이 약 1m이고 이곳에서 연꽃무늬 수막새, 토기, 금동제 귀고리, 등잔, 개원통보, 대바구니, 목간(木簡) 등의 다양한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 특히 나무패에 글씨를 쓴 목간은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백제왕궁의 정확한 위치와 전체적인 범위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는 않다.

앞으로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궁장(宮牆: 궁을 둘러싼 담장), 성토대지, 건물과 도로의 흔적 등을 근거로 왕궁 내 주요 시설의 위치와 범위를 확정해갈 필요가 있는 곳이다.
/김태신 ktx@korea.kr
 


관북리유적지

▲ 관북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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