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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삶과 전쟁, 자연의 무상함이 뒤엉킨 역사의 상흔

충남의 재발견 ⑮ 금산 백암산

2013.06.25(화) 16:03:3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600고지 전승탑 조각상

▲ 600고지 전승탑 조각상



빨치산 최후 격전지로 아픈 기억의 장소
60년 세월 지나 평화로움만 가득
전쟁·사회·자연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 돼야


깊음을 간직한 산에는 눈과 마음을 홀리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가득하다. 특히 한여름 녹음이 짙어질 대로 짙어진 산들은 넘쳐나는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한다. 몸집이 큰놈은 큰놈 대로, 작은놈은 작은 대로, 복잡한 놈은 복잡한 대로, 단순한 놈은 단순한 대로 저마다 삶을 이어간다. 금남정맥 줄기를 타고 이어진 충남 금산의 백암산은 바로 그런 곳이다.

백암산은 충남에서 산세가 험준한 곳 중 하나다. 이곳은 금강의 남서쪽을 지나는 산맥 중 한 자락으로, 백두대간에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운장산과 북쪽으로는 대둔산, 남동쪽으로는 덕유산으로 둘려있다. 덕분에 백암산에 오르려면 수많은 산허리를 지나 수없이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인간의 발길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탓인지 속세의 기운이 약하다. 높이도 600m에 달해 낮고 가까운 하늘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을 벗어나 신령스러운 모습에 가깝다. 여름 햇살의 강렬함도 숲의 장막을 지나면서 신선한 빛으로 산화한다. 바로 어제 쏟아진 장대 같던 장맛비도 어느새 숲의 생명으로 흡수돼 산과 하나가 됐다. 조화의 신비와 상생의 지혜가 백암산에 깃들어 있음을 떠오르니, 인간사의 다툼과 번뇌가 부끄러워 졌다.

한국전쟁 600고지의 상처

백암산은 한국전쟁 중 600고지 전투로 유명하다. 600고지의 600은 인근 서암산과 백암산의 높이가 각각 610m, 650m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600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험준한 산세를 활용해 빨치산 활동을 펼친 지역이다. 빨치산 활동은 전후에도 이어졌고, 결국 이들은 격퇴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생에 가까운 금남정맥의 한 자락인 백암산이 한 순간 야만의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아픈 역사의 기록이다.

이곳에는 당시 전투에서 희생한 한국군과 경찰, 민간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전승탑이 세워졌다. 600고지 전승탑은 백암산의 굽은 산길을 타고 한참을 올라 진산과 남이 지역으로 분할되는 산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전승탑에 도착하면 50평 남짓의 주차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폭염이 쏟아지는 평일 한낮이라 방문객은커녕 등산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세대의 차량과 소박한 잡화점만 한적함을 달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전승탑까지는 70여개의 오르막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계단 입구 양옆에는 전승탑 건립비와 건립개요가 적힌 현판이 세워져 있다. 몇 자 읽어보다 내리쬐는 태양의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계단 위 그늘로 향했다.

계단에 오르면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세워진 전사자 충혼비와 참전 공적비를 만나게 된다. 각 비석 뒤에 세워진 담 돌에는 당시 전사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을 읽자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세울 수 없었던 비극의 역사가 참담했다. 원하지 않은 전쟁과 원치 않은 죽음을 달래기에는 두 비석이 초라해 보였다.

비석을 지나 전승탑으로 향했다. 세 개의 탑신과 진격하는 군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조각상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 다 봤다. 마치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처럼 들뜨고 결단에 찬 표정이었다. 군복을 입은 한 명은 진격을 외치고 있고, 그 아래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수류탄을 던지는 찰나다. 뒤를 따르는 사람은 학도병인 듯한데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멀리 대둔산의 전경이 펼쳐진다. 아무래도 그곳까지 진격해 지긋지긋한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은 심정이었나 보다.

잠시 더위를 피하려 나무 그늘로 몸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에 몸의 열이 식으니 정신이 상쾌해 졌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조각상처럼, 당시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니 마음은 오히려 무거워 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념과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불의의 죽음을 당했을까. 상처받고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상처는 무엇으로 기록될까.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탈리의 말처럼 이들의 죽음은 오늘날 대한민국 건립을 위한 위대한 이야기가 됐지만, 결국 전쟁이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떠밀린 불행한 시대의 서글픈 죽음의 기록이다. 어떻게 전쟁과 야만의 폭력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국가 건립이란 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문명을 평화롭게 세우기 위한 노력이자 과정이라면, 어쩌면 이들의 죽음은 전쟁과 사회,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성찰에 출발점으로 확대·기억돼야 할지 모른다.

야생의 거침이 무성한
백령성의 흔적


전승탑 바로 뒤편에는 둘레가 207m에 이르는 백제 시대 산성인 백령성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통해 영동과 옥천에 이르는 전략상 요충지다. 그래서인지 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자주 찾는다.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버스까지 대절해 이곳 백령성 자락을 시작으로 운장산과 남이휴양림 등을 오르내린다 한다. 용기를 내 백령성으로 향하는 오솔길에 발길을 옮겨 본다. 여름의 기운 탓인지 키만큼 자란 억센 풀들이 한 가득이다. 오솔길 왼편은 자칫 비명횡사할 정도의 가파른 경사로가 이어졌다. 정신을 바짝 든다.

조금만 들어가면 ‘금산 백령성’이라는 비문이 나온다. 그 옆에서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등이 굽은 소나무가 신령스런 기운을 뿜어낸다. 그곳부터 사람이 지나는 길이 희미해진다. 힘을 내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길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문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돌로 축조된 성벽들의 폐허가 눈에 들어온다. 이리저리 찾아도 길을 발견하지 못해 억지로 내리막을 타본다. 돌과 나무가지가 무성해 쉽지 않은 산행이다. 과거 빨치산들이 왜 이곳을 근거지로 활용했는지 심정을 알 듯했다.

이리저리 돌다가 길을 잃은 듯했다. 다행히도 조그만 오솔길이 나타나 반갑다. 열심히 길을 타고 걸어본다. 맙소사. 조금 전 전승탑에서 백령성으로 올랐었던 그 길이었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여러 등산객과 함께 산행할 것이라는 변명을 뒤로하고 발음을 돌린다.

돌아가는 길, 전승탑을 스쳐 불어오는 바람에 담긴 천지 녹음의 향기가 담백하다. 외롭게 서있는 조각상은 수고했다는 듯 내 머리 위로 그늘을 내어준다. 늦은 오후 백암산 자락은 너그럽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가득했다.
/박재현 gaemi2@korea.kr
 

금산 백암산 600고지 전승탑 전경

▲ 금산 백암산 600고지 전승탑 전경


600고지 전투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은 파상공세를 퍼부으며 낙동강 인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며 남쪽에 진격한 북한군은 퇴각로를 잃고 고립된다. 결국 이들은 북으로 도망치다 전략적 요충지로 산세가 험한 백암산으로 숨어들었고, 빨치산으로 활동을 펼치게 됐다. 이때부터 600고지를 둘러싼 비정한 전투가 시작된다. 북한군은 이곳 600고지를 비롯해 서쪽으로 700고지, 800고지인 느티골과 대활골 등에 진을 치고 본거지를 구축한다.

고지 탈환을 위해 국군은 1951년 5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포함한 300여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곳 전투는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후에도 지속됐다. 당시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군은 운장산과 덕유산을 잇는 금남정맥 산줄기를 이동로로 삼아 옮겨 다니며 게릴라전을 치렀지만, 결국, 이곳에서 운명을 맞이한다.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500여명으로 집계된다. 빨치산을 포함한 인민군 2300여명과 북군과 경찰, 민간인 270여명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후 1991년 이 전투에 참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600고지 전승탑과 참전 공적비, 전사자 충혼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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