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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소중한 근대문화유산 예덕상무사 보부상

2013.06.20(목) 04:01:47 | 권혁조 (이메일주소:rnjsgurwh19@hanmail.net
               	rnjsgurwh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돈만 들고 가면 무엇이든 다 살수있는 마트와 백화점이 있는게 요즘 세상입니다. 심지어 서울 남대문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긁어 모으면 항공모함도 한 척 만들 수 있다고 할만큼 상거래와 마케팅이 발달한게 2013년 오늘의 대한민국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전에는 상거래가 어떠했을까요? 혹시 요즘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보부상이라는게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이미 다 컸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지만 보부상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아실것입니다.

예덕상무사 보부상 유품 전시관

▲ 예덕상무사 보부상 유품 전시관
 

보부상에 대한 해설

▲ 보부상 유품에 대한 해설
 

전시관내 벽에 걸려있는 당시 보부상 사진

▲ 전시관내 벽에 걸려있는 당시 보부상 사진.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순박한 민초들의 진한 삶의 향기가 묻어남을 느낍니다.


 제가 사는 예산에는 보부상의 모든 것을 알수 있는 보부상 유품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의 유품들을 둘러보며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 보겠습니다.
 소중한 근대문화 답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부상은 조선시대에서부터 구한말까지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매게 역할을 담당했던 시장의 상인을 말합니다.

 보부상의 기원은 조선건국 초기 보부상중 한명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헌한 대가로 상권장악의 특권을 부여 받고 국가의 보호 아래 육성 발전해오던게  본격적인 보부상 조직으로 형성 되었다는 것입니다.

짚신장수 보부상

▲ 짚신장수 보부상
 

옹기장수 보부상

▲ 옹기장수 보부상
 

부부가 나선 보부상

▲ 부부가 나선 보부상
 

엿장수 보부상

▲ 엿장수 보부상


 보부상은 이후 조선 고종시대에 이르러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보부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어 조선시대 유통 경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고종 당시의 기록에서 보면 보부상은 분명한 용어정리가 나옵니다.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명칭인데 보상은 비교적 값이 나가는 상품들을 보따리에 싸서 이거나 들고 다녔기 때문에 '봇짐장수'로 불렀으며, 부상은 가내에서 수공된 값싼 일상용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녀 '등짐장수'라 하였다고 하는군요.

 이 보상과 부상을 통칭하여 보부상이라 한 것입니다.
동가식 서가숙 하며 조선시대 농업사회 유통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 온 주역으로써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열심히 살았던 민초들.

보부상

▲ 보부상의 연혁
 

시장을 활기차게 했던 모습

▲ 통신수단과 지역정보 교환의 매개체 역할까지 하며시장을 활기차게 했던 모습
 

보부상들이 사용했던 도장

▲ 보부상들이 사용했던 도장
 

보부상 관련 서책

▲ 당시 사용했던 보부상 상거래 내역을 적은 서책


자

▲ 임소좌목 서책


당시에 보부상은 지역간 통신사 역할까지 했고, 더욱이 이들 조직 내부에선 금지조항으로 4계명(망언, 행패, 음란, 도둑질)을 철저히 지켜가며 자신들만의 위계질서로 엄히 다스려 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부상은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형태로 자생되어 내려 온 삶의 한 축이며 우리의 얼과 정신을 담은 구체적 생활양식이라 할수 있습니다.

상호구난

▲ 환난상구, 즉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면 함께 도와주다는 규약
 

소중한근대문화유산예덕상무사보부상 1
 

북적북적 했던 시장

▲ 보부상들로 북적북적 했던 시장
 

당시에도 호객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보부상들이 호객용으로 사용한 방울이라네요

▲ 당시에도 호객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보부상들이 호객용으로 사용한 방울이라네요


 특히 이들이 보여준 근면과 성실, 경쟁과 화합, 충의 정신과 함께 그들이 남긴 전통문화는 오늘날의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정신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돌뱅이와 현재의 보부상 두령

▲ 마지막 장돌뱅이와 현재의 보부상 두령


 위에 사진에서 보듯 <마지막 장돌림 유진룡>씨는 어린나이에 집을 떠나 머슴살이부터 시작해 스물네살에 충청남도 북쪽의 여러장터를 돌면서 어물장사를 했다는게 생생하게 기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끌려가 3년간 일본 홋까이도와 시꼬꾸의 광산에서 징용살이를 빼놓고는 죽는 날까지 시장과 더불어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 자체가 생생한 역사의 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랫부분의 두령 윤규상(尹圭相)씨. 이분은 지금 현재 예덕상무사 두령을 역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덕상무사와 보부상들은 비록 일제의 한일합병과 함께 강제 해산되었고, 오늘날은 보부상의 개념을 뛰어넘는 첨단 유통시스템이 돼 있지만 역사속으로 사라진 보부상이 우리에게 준ㄴ 의미는 크고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윤봉길의사 기념관 옆에 이렇게 자리잡고 예덕상무사 보부상 유물 전시관이 건립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그나마 재현시켜 놓아서 다행입니다.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이자 민초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알수있는 유물들입니다. 왕릉에서 발굴된 국보급 문화재도 중요하지만 우리 민초들의 삶을 알수 있는 이런 문화유산도 잘 챙기고 보존해서 후대에 꾸준히 알리고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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