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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국가 보물 제 107호 보광사대보광선사비를 보며 고려시대로의 여행

2013.06.19(수) 16:57:23 | 길자네 자스민 (이메일주소:sdkjflf332@hanmail.net
               	sdkjflf332@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부여 박물관에는 참 많은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물론 국보가 최고이고 그 밑에 보물이 있고 또 그 밑 단계에도 레벨별로 구분을 짓자면 다 등급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단순히 등급으로만 나눌수는 없겠지요. 선사시대의 조그만 돌도끼 하나도 잘 보존해야 하니까요.

 어쨌거나 다같이 소중하고, 오롯이 남아 우리 후손들에게 문화의 향연을 느끼게 해 주는 유산중에 부여 박물관의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라는 비석을 보면서 지금부터 먼 고려시대로의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부여 박물관의 보광사대보광선사비

▲ 부여 박물관의 보광사대보광선사비


 부여 국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조그만 보호각 아래 보광사대보광선사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등급으로 굳이 나누자면 국보 바로 아래인 보물 제 107호입니다.

 이 비는 고려시대에 보광사라는 절을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새긴 것입니다.

원래는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인데 이것을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거라 합니다.

 그곳의 보광사터는 아직 남아 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때에 추가한거라 합니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에 대한 상세한 설명

▲ 보광사대보광선사비에 대한 상세한 설명
 

비석 앞 상단에 씌어진 기록들

▲ 비석 앞에 씌어진 소상한 기록들
 

비석 앞 비몸에 새겨진 기록들

▲ 비석 앞 비몸에 새겨진 기록들
 

비석 앞 비몸에 새겨진 또 다른 기록

▲ 비석 앞 비몸에 새겨진 또 다른 기록


 비문에 새겨진 내용에 의하면 원명국사라는 분은 이미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인 65세로 입적하셨다고 하네요.
 19세에 등과를 했다면 요즘 나이로 고3때 과거에 급제했다는 뜻인데 머리가 참 좋으셨던 분인거 같습니다.

 국사께서는 그후 열반하시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유언하기를 자신이 죽은 후 비석이나 탑 같은것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네요. 번잡히고 많은 인력과 돈이 들어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들까봐 그런 배려를 한듯 합니다.

 그래서 결국 국사께서 열반하신지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비몸 뒷면의 기록과 상처난 부분

▲ 비몸 뒷면의 기록과 상처난 부분
 

비몸 뒷면의 다른 기록과 상처

▲ 비몸 뒷면의 다른 기록과 상처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라고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런 비는 대개 머릿돌과 함께 거북이 등에 세우기 때문에 비 받침돌이 있는게 특징인데 놀랍게도 보광사대보광선사비는 그런 특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비 받침돌과 비 머릿돌이 없는 구조

▲ 전통적인 비 받침돌과 비 머릿돌이 없는 구조
 

머릿돌과 받침돌이 없는 단순 간략한 구조

▲ 머릿돌과 받침돌이 없는 단순 간략한 구조


 즉 비 받침과 비 머릿돌이 없고, 오로지 비몸만 남아 있는거죠.
 이걸 보면 고려 후기에 세워진 비는 과거의 화려하거나 비 받침, 비 머릿돌 같은것을 생략하고 간략한 형태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비몸 가장자리 옆에 새겨진 무늬

▲ 비몸 가장자리 옆에 새겨진 덩굴 모양의 무늬
 

비몸 옆부분

▲ 비몸 옆부분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습니다. 비석이 전체적으로 화려함을 지양하거 간단합니다.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소화된 석비 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합니다.

 이런 비석이 국보나 보물급으로 평가되고 보존하는 큰 근거는 바로 비문에 새겨진 기록들이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즉 그 문화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내용이 소상히 적혀 있을 경우 그것이 발견된 장소와 주변 문화재, 그와 유사한 제작 형태등을 종합해 수많은 역사적 사료들에 대한 사실적 규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 역시 그중 하나인데 이런걸 보면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요즘 말이 떠오릅니다.

 누군가의 기록 노력 덕분에 후손들은 당시의 역사를 훤하게 꿰어 낼수 있으니 여간 고마운게 아닙니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는게 당연하게 보입니다.

 컴퓨터와 휴대폰 만지작거리느라 필기를 귀찮아 한다는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내용도 하나의 중요한 교육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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