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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인물

효자/열녀

[박승건][성은] [~]
생 애 : 박승건의 본관은 밀양이고 호는 성은이다. 광해군 1년(1609)에 출생하여 인조 8년(1630)에 진사에 오르고 삼릉제랑평시봉사(三陵齊郞平市奉事)를 지내고 호종1년(165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ㆍ병조 좌랑, 사간원정인, 시강원사서를 역임, 해운판관이 되어 해운을 개혁하고 성균관직강 예조좌랑에 재임되고 정언이 되었을 때에는 형조판서 허적을 탄핵하니 모두 그를 우러러 보았다. 그후 사헌부 시평 전라도정 제용감정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는 우암 송시열과 도의지교를 맺어 왕래하였으며 천성이 지효하여 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형제에게 우애함이 높이 사져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박세주] [~]
생 애 : 박세주의 호는 정수당(靜水堂)으로 박승건(朴承健)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모친이 항질(項疾)로 침을 맞으려 할 때 그가 먼저 목에 침을 꽂은다음 어머님에게 침을 놓으라고 청할 만큼 효도가 지극하였다. 그가 13세 때 용인군수(龍仁郡守)로 가 있던 부친이 병으로 고생할 자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설중에 대밭에 나가서 천신께 빌어 죽순을 구하였다 한다. 또한 부친이 상주 목사로 재임 중 단지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모친의 병환에도 단지하여 효능을 보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 효행을 높이 사서 정려를 내렸다.
[김첨희][金瞻憙] [~]
생 애 : 김첨회의 본관은 경주로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양친을 봉양하는데는 남달리 뛰어났다. 양친이 병석에 눕게 되면 하늘에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거상 3년을 치르니 모두 감탄하였고, 고종 때 경복궁 중수에는 재정의 궁핍을 듣고 모금하여 925냥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로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참찬(參贊)에 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고이대] [~]
생 애 : 고이대는 아버지가 병이 나서 거동도 못하게 되자 약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으며, 병환에 차도가 없고 점점 더 심해지자 직접 아 버지의 변을 맛보며 병세를 판단할 정도로 효자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어머니마저도 세상을 뜨자 산소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몸부림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서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성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 서 그에게 통훈대사부 사헌감찰(司憲監察)의 벼슬이 내려지고 또한 효자분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고득천도 가문에서 내려 오는 효심을 닮아 부모님을 지극히 모셨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약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었고 숨을 거두기 직전 몹시 신음하니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입에 넣어드려 며칠동안 연명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집안에 부자가 저렇게 효자일 수 있느냐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 알게되어 그에게도 정문을 내리는 은전을 베풀며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로높이 칭찬하였다. 또한 고이대의 셋째 아들 승천(昇天)의 아들 필문(弼文)도 학덕이 높고 효심이 지극해서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지극하니 대대로 효자가 많이 나오는 집안이라 세효(世孝)의 명문이라 하였으며 여기 정려도 세효정려(世孝旌閭)라 부른다.
[전재례] [~]
생 애 : 전재례는 천안 전씨들이 모여 살았던 군북면 외부리 바깥 가마실에 태어났다. 이름부터가 "재례"인데, "예법을 지킨다",또 는 "내 행동이 예법 안에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준 까닭은 "예법을 잘 지키며 살라"는 뜻이 기도 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재례는 무덤 옆에다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슬피 울며 지냈다. 날마다 죽 만 먹고 지내다가, 영양실조에 걸려서 자주 쓰러졌다. 상복은 해어지고, 신도 낡아졌다. 재례는 결국 병에 걸려서 무덤 앞에서 죽었다. 어사 홍택이 금산지방을 순시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나라에 아뢰자, 세조 임금이 이 보고를 듣고 군북면 외부리에 정려를 세워 주게 하였다. 정각은 목조 기와집 2평인데, 바깥가마실 길가에 서 있다.
[송영립] [~]
생 애 : 송영립은 세종시대 대암리에 살았는데, 어려서 부터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농사를 짓다가,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마을 뒷산인 성재는 429미터나 되는데다 골짜기가 깊어서, 이따금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치거나 가축을 물고 갔다. 호 랑이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린 아버지는 피를 흘리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곧 숨이 끊어질 판이었다. 영립과 누이는 작대기 하나 없는 빈 손이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소리 지르며 호랑이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자 호랑이도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내버 려 두고 달아났다. 영립의 효성이 아버지를 구출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 뒤에도 20여년이나 아들 영립과 함께 살며, 극진한 효도를 받았다. 세종 갑인년(1434년)에 나라에서 정려를 세워 주었다.
[김신][金侁] [?~1274]
- 효 이야기 -
원 나라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에 왜구들이 금산에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으며 재산을 약탈해갔다. 김신의 어머니도 함께 죽었는데,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이...
생 애 : 고려 원간섭기때 사람으로 좌정언, 추밀원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고려 원종의 신임은 물론 원나라 황제에게도 신임을 얻은 그는 원나라 조정에 있으면서도 고려를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좌군 병마사로 떠났다가 이끼시마에서 풍랑을 만나 사망하였다.
- 효 이야기 -
원 나라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에 왜구들이 금산에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으며 재산을 약탈해갔다. 김신의 어머니도 함께 죽었는데,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이라도 찾아서 편히 장사지내야 해마다 제사도 드릴 수 있을텐데, 시신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그래서 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드렸다. 이레 동안 꼬박 밤마다 기도를 드렸더니, 이튿날 아침에 한 줄기 눈이 녹으면서 좁은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 가보 았더니, 과연 수많은 해골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시신이 불타 버려, 과연 어느 것이 어머니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 서 다시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렸다. 하느님! 이것이 만약 내 어머니의 시신이라면 이 뼈가 곧 변색되게 하소서. 그러자 맑은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덮히더니, 천둥 벼락이 쳤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과연 흰 뼈가 푸른색을 변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정말 어머니의 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신은 곧 그 뼈를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다.
[강응정][姜應貞] [?~?]
강응정
-강응정과 을문이 고기 전설-
강응정은 효행이 지극하여 3년간 어머니의 병을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5년간을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있을 때 어느날 갑자기 을문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기이고, 엄동설한이라 구할 수도 없어서, 정한수를 떠다 놓고 정성을 다해 빌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소나기...
생 애 : 1470년(성종 1) 효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부모의 병간호가 지극하였고, 죽은 뒤에는 여묘(廬墓)의 예를 다함으로써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강응정과 을문이 고기 전설- 강응정은 효행이 지극하여 3년간 어머니의 병을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5년간을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 머니가 병으로 누워있을 때 어느날 갑자기 을문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기이고, 엄동설한이라 구할 수도 없어서, 정한수를 떠다 놓고 정성을 다해 빌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소나기와 함께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응정은 그 고기를 배를 가르고, 그 알과 내장을 인천리 냇가에 버리고 고기국을 끊여 드렸다. 그 알이 부화되어 을문이 고기는 인천리 냇가와 논산 저수지 사이에 지금도 서식하고 있다. 일명 강효자 고기라고도 한다.
업 적 : 성균관유생으로 김용석(金用石)ㆍ신종호(申從濩)ㆍ박연(朴演)ㆍ손효조(孫孝祖)ㆍ정경조(鄭敬祖)ㆍ권주(權柱) 등과 함께 주자의 고사에 따라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서공][徐恭] [?~1171]
생 애 : 음보(蔭補)로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165년(의종 19) 삼사판사(三司判事)에 이르렀다. 6차에 걸쳐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를 역임하고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항상 무신을 두둔하고 문신의 교만을 비난함으로써 정중부(鄭仲夫) 의 난 때는 중방(重房)에서 파견한 순검군(巡檢軍)의 보호를 받고 화를 면했다.
업 적 : 무신을 두둔하고 문신의 교만을 비난하였다.
[김만중]([金萬重][서포(西浦)]) [1637~1692]
김만중
생 애 : 김만중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고, 어머니 윤씨는 두 아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을 하면서 자식들을 정성껏 키웠다.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홀어머니의 극진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김만중은 14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했고, 1665년에는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했다. 1666년 정언이라는 관직을 시작으로 여러관직을 두루거쳐 1671년에는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 대제학 등을 지냈다. 김만중은 1687년에 대제학에 있으면서 희빈장씨의 일가를 비난한 일로 평안도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자, 왕자 탄생의 기념으로 유배에서 풀려 났다. 그러나 이후 숙종이 중전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 를 중전으로 책봉한 것에 반대를 하다가 다시 남해에 유배되었다. 어머니를 즐겁게 하여 드리기 위해 책을 구해 드리고 패관 잡 기류를 직접 읽어 드렸을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던 김만중은 유배지 남해에서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하루밤만 에 『구운몽』을 지었다. 또 『사씨남정기』도 지었는데 『사씨남정기』는 주인공 사씨의 생애를 인현왕후의 생애와 유사하게 그린 작품이 다. 귀양갈 때 외에는 어머니 곁을 떠난 적이 없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1692년 남해의 유배지 노도라는 섬에서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업 적 : 지식인이었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 점등에서 사상의 진보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가 주장한 '국 문가사 예찬론'은 문학이론에서의 진보성을 보여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후 허균의 뒤를 이어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나타난 그는 우리 문학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즉 소설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에 있어 소설의 가치를 인식, 창작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후 국문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국자의식(國字意識)은 높이 살 만하며, 순수한 우리말로 유배지에서 쓴 『구운몽』같은 국문소설의 창작은 허균을 잇고 조선후기 실 학파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작품으로 소설 『구운몽』,『사씨남정기』, 시문집에 『서포집』,『서포만필』,행장 정경부인 윤씨 행장(尹氏行狀) 등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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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1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