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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얼과 명품 사운고택이 품은 조형미

이재인의 물 따라 길 따라 (3)반계포구

  • 등록일자
    2025.03.07(Fri) 09:04:05
  • 담당자
    도정신문/deun127@korea.kr
  • 반계포구가 있었던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드론사진.

    ▲ 반계포구가 있었던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드론사진.



    반계포구의 숨은 이야기…전통 고택도 400년

    “이 맛을 대대로 전하라” 여성 기록 문화의 전범



    충남 예산의 반계포구는 백제 주류성이 품고 있다. 

    장곡면 산성리 즉 동남로 989-22 사운고택에서 반계포구는 동쪽으로 500m 밖이다.


    더 쉽게 말하면 산성리 ‘고미당’ 마을회관 앞이다. 옛 이름은 원님골 초입이다. 무한천의 포구 가운데 우위가 둘째나 셋째가라면 서러울 사운고택이 있고 그 뒤로는 학성산성을 배경으로 조용한 마을이 있는 곳이다.


    조용한 마을이라면 예부터 높은 향리의 어른이 거주하거나 벼슬아치가 사는 명당 마을이기 쉽다. 작고하신 고대 사학자 ‘가릉 박성흥’ 선생은 이 마을의 터가 빼어난 특수 명당이라 해석했다. 


    사운고택 솟을대문

    ▲ 사운고택 솟을대문


    그런 명리에 따른 까닭인지 예부터 윗부분은 사운고택이 앉은 자리는 용이 하늘을 나는 자세였고, 또한 산성 아래서 내려다보면 반드시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이라 했다. 

    그래서 사운고택은 영의정, 형조판서, 관찰사, 현감이 연이어 배출된 곳으로서 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 찾아오는 곳이다. 이 사운고택 앞, 지금은 비봉면 옥계리와 장곡면 산성리가 이어진 다리 밑이 ‘반계포구’였다고 옛 향토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옥계리 쪽에서 보면 ‘옥계포구’라 하고, 산성리쪽에서 보면 학성산성 이름을 따서 ‘학성포구’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보다 확실한 근거는 이병환이 1990년 편찬한 지리서 「환여승람」에 ‘반계천’이라 일컫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닭을 많이 키우는 축사 위쪽에 있다하여 사람들은 ‘당마루포구’라 부르기도 했고 건너편 포구는 ‘예당 큰집 끝머리 산’아래 있다 하여 ‘뱃머리 포구’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아무튼 글을 숭상하고 유교적 사상을 지니되 고루하지 않고 새 문명을 수용했던 우화정(雨花亭) 댁에, ‘조환웅’ 향토 사학자의 집은 근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고리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사운고택은 400년 고택이 백제산성과 이 지역 역사를 동시에 아우르고,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 주인의 사상에 있다. 

    특히 주변에는 백제 시대에 당나라 군대와 접전했던 ‘소구니 산성’ ‘학성 산성’ ‘석성 천태 산성’이 크고 작은 모습으로 산허리를 돌아 우뚝 솟아 있다.


    위치도


    반계천을 앞에 두고 백제의 자주적 국토방위를 엄중히 했던 망루가 그윽이 내려다보는 곳이기도 하다. 반계천의 옥계포구를 중심으로 동, 서는 각각 백제의 수도 부여를 향한 망루가 산성위에 복원된 모습으로 지금도 당당하게 서있다.


    사운고택은 400년 전통의 명품고택이기도 하다.


    이 고택은 소위 우화정(雨花停)이라는 옛집이 있다. 이곳은 ‘국가 민속 문화재 제 198호’ 다. ‘양주조씨 장령공파’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양주조씨가 산성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첨지중추부대사 조태벽(趙泰碧) (1645~ 1719) 후손들이 이곳에 낙향 후 세거를 이루게 되었다.


    조태벽은 사헌부장령 조진석(1610~1654) 아들이며 충정공 조계원(趙啟遠)(1592~1670) 손자다. 조계원의 아호는 약천이고 인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존성의 아들이다.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위’의 사위이기도 하다. 또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작은아버지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를 지냈고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양주조씨 후예가운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중세’(趙重世) (1847~1898) 고종 2년 19세에 문과에 급제 구한말인 1886년 경에 연산 현감을 거쳐 하양, 진안, 문경 현감을 지냈다. 


    1890년 고종황제의 개혁정책으로 설립된 광산개발을 위한 광무국(礦務局) 주사를 역임하기도 한 많은 인물이 배출된 명가(名家) 이다. 명가(名家) 라는 대명사는 집이 컸다. 명가는 아니다. 고택의 가족들이 정치, 사상, 종교적 이데올로기, 일반 국민에게 끼친 영향력이 바로 명품 고택의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이 항례이다.


    이 명품 고택에는 당대의 내노라하는 벼슬아치보다도 더 아름다운 정신의 소유자 여성이 있다. 문동(文同)이라는 아호를 지닌 전의 이씨 숙부인(1867~1938)이 그 주인공인데 이 고택에 그가 1891년 2월 4일자로 한글 필사를 마친 「음식 방문니라」 필기(筆記)가 있다. 이 고문서는 요즘 말로 ‘음식다미’ 비결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 반가의 음식 제조법을 기록하고 있음은 여성으로 보기 드문 기록문화의 보고임을 입증하고 있다.


    음식방문니라 표지 이병환이 1990년 편찬한 지리서 「환여승람」


    이 고문서 편찬 방법은 순 우리의 한지漢紙에 기록했는데 1800년대 제책 수법은 중철식이다. 이는 우리 여성들이 당대 ‘언문’ 이라고 무시당했던 풍조에 일종의 소리 없는 저항이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송철의(前국립국어원장) 교수는 “문체가 사실적 표현으로 우리 여성문화의 결정체로 보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저자인 전의 이씨는 규장각(奎章閣) 검서관을 거쳐 서예가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던 통정대부승지 조용호(1876~1941) 의 부인이다. 이는 이 고택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더욱 빗나게 하는 기록이다.


    ‘선진국이라는 국호는 모든 삶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나라이다’ 라는 말이 실감 난다.


    이재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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