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공자입니다. 공자는 춘추시대 유학자로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려서부터 예(禮)에 밝았으며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60대 후반인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정사에 참여하진 않고 후학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힘쓰다 70대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지난달 9월 28일에는 공자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며 서산향교 대성전에서는 행사가 열렸다고 합니다. 서산향교는 서산의 도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당대 유명했던 수많은 사상가 중 하나였음에도 그 위상은 거대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 석가모니와 동급으로 여겨지며, 죽어서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기에 향교 등에서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때만 하더라도 향교는 그냥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사용되어서 별 생각없이 향교안에서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공자의 가문인 공씨는 송나라에서 노나라로 망명 온 가문이었으며, 송나라는 고대 주나라가 상(商)나라를 정복한 뒤 주나라에 적대하지 않은 일부 상나라 유민들을 거두어 상나라 왕족을 제후에 봉함으로써 세워진 나라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문을 제대로 아는 학생들이나 젊은 분들이 많지가 않은데요. 저희때만 하더라도 어릴때 부모나 마을에서 한문을 많이 배웠습니다.
서산향교안에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는 조금씩 그 색이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요. 조금만 있으면 향교안에 은행나무들은 그 모습을 바꿀듯 합니다.
저도 단독주택에서 오랜시간 살다가 아파트에서 거주한 지가 벌써 5년이 넘었는데요. 옛날에는 이런 건물에서 거주하면서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요.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되는데,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장(長)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옛 사람들중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은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채 그 수세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제사를 지내던 공간으로 올라와봅니다. 선비는 단순히 앉아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관료로서 공무 전반의 모든 실무에 능숙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국에 남겨져 있는 234개 향교가 모두 잘 보존되어 온 것은 아니고 개화기 과거 시험 철폐 이후 기능이 정지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상당수 훼손되었습니다.
이곳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선현들의 제사를 하고 있습니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기에 그 의미가 남다른 사람이기도 합니다.
서산향교
충남 서산시 동문동 580
* 취재일 : 9월 29일